부모님이 겪은 6. 25 (2)

 

  부모님이 겪은 6. 25의 일반적인 이야기는 앞에서 했고, 여기서는 다른 2가지만 소개한다.

 

1. 갓대미산 혹은 각대미산
  우리 郡에는 갓대미산이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산이 있다. 원래 이름이 여항산이고 또 대부분 여항산으로 불려지는데, 간혹 어른들은 갓(각)대미산이라고 부르곤 한다. 이 여항산은 백두대간에서 뻗어나온 여러 정맥들 중의 하나인 낙남정맥(洛南正脈)의 중간쯤에 있는 산으로, 가장 높은 산이기도 하다. 낙남 정맥은 <낙동강 남쪽에 있는 산줄기>라는 뜻으로, 지리산에서 발원하여 경상남도를 서에서 동으로 가로질러 김해까지 연결되는 산줄기이다. 남부 지방의 산이 그렇듯이, 백두대간의 험준한 산줄기에 비해서는 그야말로 동네 뒷산 수준이지만, 그래도 경상남도 해안 지방과 내륙 지방의 풍속이나 상권, 음식 문화 등을 구분해 주는 경계가 되는 산줄기이다. 그리고 여항산은 이 낙남정맥의 올말졸망한 산줄기 중 가장 높고 가장 험한 산이다. 해발 고도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약 600~700m급일 것이다.
  

  백두대간에도 언급되는 유서깊은 이 여항산이 갓대미산이라는 요상한 명칭으로 불려지는 유래를 도저히 알 수 없었는데, 작년에 고향에 가서 아버님과 이야기하던 도중에 그 유래를 알게 되었다. 앞 글에서도 설명한 6. 25 전쟁 중의 격전지(마산 방어선의 일부)로 이 산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펼친 미군이 하도 많이 죽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갓대미산은 바로 미군들이 중얼거렸을 <god damn>이라는 욕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미군들이 <갓댐, 갓댐>하던 것을 욕인줄도 모르고 그냥 미군이 이 산을 <갓댐산>이라 부르는구나 하는 오해에서 비롯된 명칭이 바로 갓대미산이다. <갓댐산>이 발음하기 좋게 <갓대미산, 각대미산>으로 변한 것이고......
  사실 이 산은 높이는 그리 높지 않지만, 남부 지방에 있는 산 답지 않게 험한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산에서 빨치산이 1954년도에 사살되었다는 소문도 있을 정도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장마나 집중 호우가 끝난 후에는 인골도 심심찮게 드러나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산 밑에 있던 마을이 고향인 중학교 선생님께서도 이곳 전투에 대해 언급하신곤 했다. 선생님께서는 당시 죽어 있던 덩치 큰 흑인을 처음으로 보셨다고 하며, 전쟁 후 얼마동안 중학생 또래 이상의 사내애들의 가장 좋은 놀잇감이 바로 실탄 든 총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주위에 총이 늘려있었다고 한다. 총으로 동네 애들과 사격 시합도 하고, 새도 잡았다나...... 비록 몇년 후 정부에서 일제히 총기를 회수한 후에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고 했지만...
  어쨌든 미군의 흔적이 지명에까지 남아 있는 걸 보니, 6. 25의 충격이 크긴 큰 모양이다.

 

  사족.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오는 정맥들의 이름을 해석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대부분의 정맥 이름이 강을 기준으로 붙여지기 때문이다. <한북정맥>은 한강 북쪽을 달리는 산줄기라는 뜻이고, <한남금북정맥>은 한강 남쪽, 금강 북쪽에 있는 산줄기라는 뜻이다.

 

2. 말탄 채 저격당한 인민군 장군
  우리 마을은 함안군과 진양군(지금은 진주시)의 경계선에 있다. 즉, 우리 마을은 함안군의 가장 서쪽에 있는 마을인 셈이다. 마을에서 진양군으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로 기차길을 따라 가면 외갓집이 있는 이반성면이 나온다. 그런데, 기차길 옆에 차길도 같이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곳에는 80년대 중후반에야 차길이 생겼다. 그 전에는 郡의 경계가 기차 터널이었고, 터널 위의 고개로 겨우 오솔길이 나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진양군으로 가는 두번째 길은 지방도를 따라가는 곳으로, 이곳을 통과하면 반성면이 나온다. 옛날부터 주요 교통로였던 셈이다. 결국 우리 동네는 기차와 자동차길이 다 있지만, 우리 마을과 붙어있는 진양군의 두 마을에는 기차길이나 자동차길 중 하나만 있는 셈이다.
  지방도를 따라가는 길은 상당히 험한 고갯길로 아흔아홉 굽이는 안 되더라도 몇십굽이는 족히 되는 곳이다. 2차선으로 깨끗하게 포장되어 있지만, 지금도 야간 운행일 경우 초행길인 운전사가 실수로 고개 밑으로 굴러 떨어지는 사고가 간혹 일어나기도 한다. 남부 지방의 도로 치고는 꽤 험한 곳이라 할 수 있다.
  이 고개 정상을 기준으로 한쪽은 함안군이고, 다른쪽이 진양군이다. 그런데, 고개 아래 진양군 쪽의 첫 마을 이름이 <까막골>이다. 한자로 <오동(嗚洞)>이라고 할 정도니 옛날에는 꽤 두메산골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에 비해, 우리 마을은 기차역도 있고, 또 결정적으로 평야지대가 산간지대로 이어지는 경계선에 있기 때문에 오지라는 느낌은 안 든다.)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고개가 시작되는 까막골의 바로 첫 지점에 커다란 저수지가 있는데, 이 저수지에서 6. 25 때 말탄 인민군 장군이 저격당해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고개 주위의 산에 매복한 미군에 걸려 엄청난 수의 인민군들이 전사한 것은 물론, 말을 탄 장군까지도 여기서 전사했다는 것이다. 군사적 지식이 별로 없는 내가 보기에도 이 고개는 방어하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렵게 되어 있다.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인민군들이 여기서 한번 된통 당한 셈이다. 물론, 후일 인민군은 이 고개를 점령하는 것은 물론, 마산의 코앞까지 진격했지만...
  아마 이 전설이 사실이라면, 인민군 6사단의 고위 장교가 여기서 전사했을 것이다. 말을 탄 채 지휘했다는 것이 신빙성을 조금 떨어뜨리기는 하지만, 6. 25 당시의 인민군에 기병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고, 또 장비나 보급품의 운반에 소나 말이 광범위하게 이용되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고급 장교가 찝차가 아닌 말을 타고 지휘했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럼, 최소한 대대장급 이상 어쩌면 연대장이나 사단장 정도가 여기서 전사했다는 말이 되는데, 戰史를 확인해 보지 않아 사실 여부는 모르겠다. 하긴, 국군이 아닌 인민군의 전사자가 누군지는 인민군측 사료가 아닌 이상 확인할 수 없을 확률이 더 높다. 6. 25 당시 상대가 되었던 인민군 부대가 어떤 사단인지 모르는 경우도 있을 정도이니, 결국 까막골의 전설은 영원히 전설로 남을 확률이 높다.

  혹시 통일이 되어 인민군측 사료를 확인할 수 있다면 그 말탄 장수를 확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는 전설일 것이다.

 

  과연 아버지가 알고 있는 이 전설이 사실일까?
  사실이라면 그 장수는 누구였을까?
  그리고 그의 시체는 어떻게 되었을까? 저수지에서 건져내 제대로 매장이나 해 주었을까?
  통일로 이런 모든 궁금증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빈다.

2000년 6월 19일 작성